
올겨울 감기, 독감, 편도염 등 호흡기 질환이 유난히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전국 약국마다 “약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단순히 환자 수가 늘어서 약이 모자란 게 아니라, 약국의 진열대가 비어 가는 “공급 붕괴”가 실제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감기약, 진해거담제, 항생제, 혈압약 등 필수 약들이 몇 달째 동나며 약사와 환자 모두 불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대체조제 확대’라는 카드로 대응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업계에서는 “문제의 핵심은 제조 부족이 아니라 유통 구조”라고 말합니다. 즉, 공장에서 약을 적게 만드는 게 아니라, 약이 도매 단계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국까지 내려오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1. 감기약·항생제 품절, 왜 몇 달째 반복되나?
자주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자가 많아서” 또는 “제약사가 안 만들어서” 약이 부족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원료 수급 문제나 생산 차질이 있을 순 있지만, 이번 사태는 그 정도 수준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국가통계포털 자료에 따르면 국내 의약품 도매업체는 2024년 기준 3,999곳. 10년 전(1,966곳)의 두 배 이상이며, 제조소(316곳) 대비 10배 이상 많습니다. 제약사는 적은데, 유통 중간상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구조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품절 조짐이 보이는 약이 생기면 도매업체끼리 재고 쟁탈전을 벌입니다. 그러는 동안 환자에게 공급돼야 할 약은 도매창고에서 몇 번씩 이동만하고 약국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어딘가 재고는 있는데 환자 손에는 닿지 않는 모순적 상황이 반복됩니다.
2. “대체조제 확대”는 임시방편일 뿐
정부는 ‘대체조제’를 강조합니다. 즉, 처방된 약 대신 다른 회사의 동일 성분 약을 제공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겠다는 것입니다. 논리상 문제없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한계가 많습니다.
- 대체 가능한 품목이 적음
- 처방약은 브랜드별로 효과·부작용 프로파일이 다름
- 환자가 불안감으로 대체약을 거부하는 경우 다수
약을 구하는 것이 목표인 환자 입장에서는 대체약이라도 받는 것이 해결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그 대체약조차 품절”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3. 유통 구조가 왜곡된 이유 — ‘끼워 팔기’와 가짜 품절
유통망이 불투명하다보니 다양한 편법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끼워팔기입니다. “이 약을 원하면 다른 재고가 남는 약을 같이 사라”라는 방식입니다. 약국은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구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불필요한 재고를 떠안게 됩니다.
올해 실제 사례도 있습니다. 비만치료제 ‘삭센다’ 공급이 부족해지자 한 유통업체가 재고가 많은 ‘위고비’를 끼워 팔았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또한, 일부 유통 직원이 “추석 이후 특정 진해거담제 시럽이 품절될 수 있다”라고 문자를 돌렸고, 그 소문이 퍼진 뒤 실제로 주문이 몰려 “소문이 현실을 만든” 품절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약업계는 이를 “가짜 품절”이라고 규정합니다. 약이 ‘없어서’ 품절이 아니라, “팔지 않고 숨겨놓은” 품절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4. 기술의 부재 — 재고 추적 시스템이 없다
이 모든 문제의 근본에는 실시간 유통·재고 추적 시스템의 부재가 있습니다. 대형 플랫폼, 편의점, 온라인 몰 등은 1분 단위로 재고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의약품 유통망은 여전히 전화·팩스·문자 중심입니다.
약국마다 “재고 있나요?”를 묻는 시대가 2025년에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환자가 약을 구하지 못하는 동안, 도매창고 어딘가에서 재고가 반품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합니다. 분명히 약이 존재하는데 “누가 갖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급이 마비되는 것입니다.
5. 도매업체가 너무 많다 — 시장은 이미 붕괴돼 있다
의약품 유통은 공공성과 안정성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국내는 중소 도매업체가 과도하게 많은 구조입니다. 이를 뒷받침할 인력·시설 투자가 어려워, 품절 상황에서 어떤 업체가 어떤 물량을 갖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약국-도매’ 간 거래는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시장 전체의 투명성을 떨어뜨립니다. “나한테 약 좀 남겼어?”가 시스템의 본질이 될 때, 결국 환자와 약사만 피해를 입습니다.
6. 단순히 생산만 늘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정부는 “공공 생산 네트워크 구축”을 이야기합니다. 필수 의약품 공급 기반을 확보하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약을 ‘누가 만들고’ ‘누가 갖고 있느냐’를 추적하지 못하면 그 효과는 제한적입니다.
유통 구조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생산량만 늘리면, 결국 도매 창고가 더 많은 재고를 쌓는 것으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약은 환자에게 가야 합니다. 공장 → 도매 → 약국의 흐름이 시스템 기반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문제는 반복됩니다.
7. 환자가 할 수 있는 현실적 대응법
약가 문제, 정책 방향과는 별개로 환자 입장에서 당장 필요한 건 “지금 당장 약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 처방전이 있다면 대체 성분 가능 여부를 약사에게 반드시 문의
- 가능하다면 인근 2~3개 약국 전화 확인 후 방문
- 진해거담제·해열제의 경우 복합제 대신 단일 성분을 고려
- 장기 복용약(혈압·당뇨)은 장기 처방 미리 확보
이 방식은 완벽하지 않지만, “품절 리스크”가 퍼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체감 가능한 대응입니다.
8. 결론 — 지금 문제는 수급이 아니라 유통이다
감기약·항생제·혈압약 품절 사태는 단순한 재고 부족이 아닙니다. 한국 의약품 유통망은 유통업체 과잉 + 정보 비투명 + 편법 관행 + 기술 부재라는 네 가지 문제가 결합된 구조적 마비 상태에 가깝습니다.
“환자에게 약이 가지 않는다”는 단순한 결과 뒤에는 수많은 거래 단계가 숨어 있습니다. 해결책 역시 단순히 “더 만들어라”가 아니라, 유통의 투명화와 디지털 전환입니다. 이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내년에도 우리는 같은 뉴스 제목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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